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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 날짜 2013-07-08
글쓴이 조남길 조회수 1441 추천 0
“정치적 쟁점, 헌재(憲裁)보다 여야 합의로 풀어야”

대한민국은 세계 민주주의사에 모범적인 나라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했을 뿐 아니라, 반민주세력을 단죄하고, 민주화 유공자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상한 유일한 나라다. ‘사필귀정’과 ‘인과응보’ 없이 쿠데타가 되풀이되는 제3세계 국민들이 우리의 민주화 운동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역사적 단죄 근거 제시

그 중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한국, 아니 세계 민주주의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문구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방점을 찍은 이 문장은, 그러나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조승형 전 의원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사장되었을 지도 모른다.

때는 조 전 의원이 헌법재판관으로 재직하던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검찰은 5.18 사건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 피해자들이 이에 불복,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낸 상황이었다.

조승형 전 의원 (13대)

그러나 헌재의 분위기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헌재가 우리 헌법과 형법, 그리고 일본 헌법과 형법 등에 정통한 학자들에게 5.18 사건과 관련해 자문을 구했는데 검찰의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법률적 논리를 제공한 독일 학자의 논문을 참고하기로 하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라는 원문을 찾아냈습니다. 이 문장이 일본을 거쳐 오는 동안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의역, 오역된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이후 그는 평의(評議)에서 독일 학자의 논문 원문을 동료 재판관에게 보이며 법 논리적으로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끈질긴 설득작업을 펼쳤다. 그의 설득은 주효했다. 평의가 진행될 때 마다 한 명 한 명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헌법재판관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7대 2가 되며 다수 의견이 되었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탄생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선고일을 하루 앞두고 판결문을 쓰려는 찰나 청구인들이 헌법소원을 취하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보통 소원이 취하되면 심판 절차가 종결돼 아무런 결과물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헌법적 책임이 필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소를 취하해도 심판을 종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이끌어냈습니다.”


정치를 멀리 했지만, 운명적으로 정치의 핵심에서 활동

천신만고 끝에 겨우 빛을 보게 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라는 이 문장은 향후 우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일으켰다. 헌재의 의견과 맞물려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특별기자회견을 발표했고, 국회에서도 5.18특별법이 제정돼 쿠데타 세력에 역사적인 심판을 가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 및 수도이전 논란에서 동성동본 혼인금지 및 호주제, 간통죄 폐지에 이르기까지 헌법적 분쟁을 해결하며 국가 사회를 통합하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헌법재판관으로도 활동했지만 사실 조 전 의원은 오늘의‘강력한’ 헌재를 만든 ‘산파’ 중 하나이다. 헌법재판소 출범 전 그는 야당 측 대표로 헌법재판관의 상임화를 반대하는 여당에 맞서 상임화를 고집했고, 결국 헌재가 명실상부한 헌법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초석을 마련했다.

헌법재판소시절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조 전 의원은 이른바 ‘동교동 가신’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을 두 차례 역임하는 등 김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이는 그가 당시 야당에서는 드문 법조인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에 뜻이 없던, 그래서 사심이 없던 점을 김 전 대통령이 높이 산 결과이기도 하다.

“민추협에 가입한 것도, 정당에 들어간 것도, 또 국회의원이 된 것도 모두 제 의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정치를 그토록 안 하려고 했는데 때로는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운명적으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실제로 그는 민추협 가입 시 ‘정치를 안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으며, 13대 총선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배려에도 불구, 전국구 후번을 자처했다. 의원직도 2년만 하고 사직하려 했지만, 보좌진들의 만류로 겨우 뜻을 접었다. 92년 12월 대선 당일에는 결과와 관계없이 탈당계를 제출했다. 정계 입문 이후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는 늘 정치를 벗어나고자 했다.

4년의 짧은 의정생활이었지만 그가 정치선진화에 미친 영향은 크다. 무엇보다 정치자금법 개정에 앞장 서 ‘돈 안 드는 선거’를 정착시킨 것이다. 13대 총선 후 그는 방송사 토론프로그램에 나와 ‘공천 헌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야당의 어려운 현실을 고해성사했고, 이는 정당에 국고보조금을 지급하는 선거공영화를 이끌어 냈다. 아울러 14대 총선을 앞두고 스스로 전국구 재공천을 포기함으로써 지금은 여야 정당에서 관례가 되다시피 한 ‘비례대표 단임원칙’을 정착시켰다.


4년 전 변호사 휴업계 낸 뒤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

그는 1999년 헌법재판관을 퇴직한 뒤, 2001년 세종재단 이사를 지냈다. 그리고 99년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2006년 9월 휴업계를 낸 뒤 특별히 맡은 일 없이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65세 이후에는 은퇴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타인의 일생이 걸린 일반 소송 사건은 맡지 않고 자문이나 고문, 내사 사건 등만 맡았습니다. 사실 그러면 돈이 안 되는데 동료 변호사들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잘 결정했냐고 놀라기도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더군요.”

민주화가 되었지만 많은 정치적 사안들이 정치적으로 해결되기보다 헌법재판소로 가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 결과 헌재의 영향력이 증폭되고 ‘헌재의 정치화’ 또는 ‘헌재의 권력화’에 대한 논란마저 일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정치권과 헌재 모두 몸 담은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헌법재판소

“헌재의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사법권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정치적 감각이 가미된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헌재가 모든 것을 사법적 잣대로만 판단한다면 헌재는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치성이 개입 되어서는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이 헌재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야는 헌재에 모든 사안을 맡기기보다 먼저 중재, 해결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는 말이 도구이지만, 헌재는 판결로 말한다. 이는 국회의원 출신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치권과 헌재에 두루 몸 담은 그에게 많은 이들이 자서전을 낼 것을 권한다. 하지만 그는 예외 없이 이를 거절하고 있다. 비공개 내용은 비공개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주 녀석들에게는 할애비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써 놓았습니다. 제가 세상을 떠나면 그 때 읽어보라고 엄명을 해 아직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양장본 자서전이 넘쳐나는 세상, 한지에 먹물로 쓴 그의 회고록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사뭇 궁금해지는 사람은 비단 취재진만이 아닐 것이다.


- 취재 박경수 미디어담당관실, 사진 조남수 미디어담당관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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